Gabrielle's story/좋은 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Yahweh Roi 2013. 11. 26. 21:41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에이든 토저

 

 

사단은 간교하게 최초의 인간 이브를 공격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그녀의 신뢰를 파괴하려 했다. 이브와 우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단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날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에게서 의의 기초를 제거하려 모호하고 파괴적인 삶을 살게 만들었다.

 

하나님에 대한 저급하고 부당한 관념만큼 영혼을 비뚤어지게 하고 흉한 모습으로 만드는 것은 없다. 바리새파 종파에서는 하나님은 엄격하고 준엄하다고 주장하면서 상당히 높은 차원의 표면적인 도덕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을 뿐 내면적으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회칠한 무덤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관념은 예배에 대한 그릇된 사상을 만들어 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으며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속박으로서 그것에서부터 도망하려면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바리새인의 하나님은 쉽게 어울려 살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종교는 엄격하고 무자비하고 사랑이 없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우리 신앙의 질을 결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의 기독교 신앙은 대체로 엄격하고 가혹했다. 그 이유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부당하고 부적절한 관념 때문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닮으려 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을 엄격하고 가혹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날 선한 기독교인 사회에는 하나님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 따른 결과로서 불행한 세상이 임한다. 사람들은 기독교 생활은 많은 기대를 하시며 용서함이 없으신 엄격한 성부의 감시 하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음울하고 단조로운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준엄하시며, 까다롭고, 변덕스러우며, 흡족하게 해드리기가 극히 어려운 분이라는 관념에서 비롯된 생활은 그리스도의 참 생명에 대한 야유적인 희문(戱文)일 수밖에 없다.

 

우리 마음에 항상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소유하는 것이 영적 행복에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냉정하고 가혹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생활은 노예적인 두려움으로 얼룩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자비하시고 이해가 많으신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내면생활 전체는 그 사상을 반영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 중에 가장 매력적인 분이시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다른 것은 알 필요가 없이 그 사랑만 알면 된다. 또 하나님은 진실로 공정하신 분이시므로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려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전혀 범죄하지 않은 사람을 대하듯이 대하실 수 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의 아들들을 향한 하나님은 자비는 공의를 이기고 승리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할 수 없이 즐거운 것이다. 하나님은 영혼에게 편안하고 치료가 되는 교제, 쉽고 억제되지 않은 교제 속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과 교제하신다. 하나님은 이기적이거나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며 쉽게 화를 내시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발견하는 하나님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년에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은 자신이 먼저 우리에게 주셨던 것들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재빨리 알아차리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아려 했다는 것을 아시면 우리의 불완전함을 눈 감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새로 피조된 세계들 보다 우리의 사랑을 귀하게 여기신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관념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렴들은 그들의 심령에 해를 끼치며 내적 자유를 파괴한다. 이러한 신자들은 탕자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맏아들처럼 엄격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열심이나 기쁨이 없이 옳은 일을 행하며,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벌어진 쾌활하고 활기찬 축하 의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상이 자기 백성들 안에서 하나님이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해 버렸으므로 그들은 찬양하고 외치는 것을 광신주의라고 여긴다. 이 불행한 영혼들은 자신의 우울한 길을 힘겹게 걸어갈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옳은 일을 하기로 작정하고 있으며, 심판 날에는 승리자의 편에 서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구조를 기억하고 계시며, 우리가 흙이라는 것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날마다 아버지를 닮아가는 아들을 보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미소, 자랑스럽고 온유한 미소를 띠시고 징계하신다.

 

신자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행동을 알고 계신다는 이유로 무서워하고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모든 인내의 총화요, 자비하신 선의의 정수이시다. 우리는 스스로 선한 사람이 되려고 광신적으로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그대로 지닌 채 하나님 팔에 안기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