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HEL 레이첼/Christianity

그리스도인의 두 소명

Yahweh Roi 2013. 12. 15. 19:26

그리스도인의 두 소명

마틴 루터

 

성경 : 에베소서 제4장 1~10절

 

이 설교는 마틴 루터가 1531년 10월 1일, 주일 오후 예배(삼위일체 주일 후 열일곱 번째 주일) 때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서 행한 것이다.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의 담임 목사 부겐하겐이 1530년 10월~1532년 4월까지 북독일의 도시 뤼벡(Lubeck)에서 종교 개혁을 위해 체류했기 때문에, 루터가 그를 대신하여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의 설교단에 올랐다.

 

이 설교는 에베소서 4:1~10을 본문으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설교의 내용 이해를 위해 루터의 소명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소명이란 어떤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1 루터는 출애굽기에 대한 설교에서 모세의 예를 통해 소명에 대해 설명한다.

 

모세의 소명(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그를 데려오셔서 그의 민족의 지배자 또는 공작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나귀를 찾던 사울을 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같다. 또한 진실로 하나님께서 양을 치던 다윗을 찾으시고 사울을 대신하여 왕으로 기름을 부으시고 확증토록 하신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큰 직무에 필요한 당신의 사람들을 찾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좇아 달리거나 뛰어서도 안 되고, 많은 책략이나 계획을 세워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들을 보시고 그들을 들어 영적인 소명에로 이끄신다(WA 16, 46, 21~28: 1524년 10월 16일 출애굽기에 관한 설교).

 

루터는 소교리문답(1529년)의 세 번째 항목에서 소명(부르심)을 매우 신학적이고 복음적으로 설명하는데, 부르심은 곧 성령의 첫 번째 활동으로 서술되고 있다.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나를 부르셨고 그의 은총(선물)으로 깨닫게 하셨으며, 참된 신앙으로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지키심을 믿습니다. 그 분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교회를 부르신 것처럼….”2이 믿음의 조항으로부터 먼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즉 우리가 개별적인 삶속에서 소명에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위탁된 것이요, 또한 소명은 계속적으로 새롭게 위탁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또한 복음의 외침을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 동등하게 여긴다.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이라는 베드로후서 1:3에 관한 설교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소명이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복음을 세상에 보내셔서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그 이전에는 일하지도, 하나님께 간청하거나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느 누군가 생각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은혜를 제공하시고 선물로 주시되, 한량없이 많이 부어 주셨습니다(WA 14, 18, 11~15).

 

소명에 대한 루터의 생각을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 소명, 곧 믿음의 영역에서의 소명(내적인 소명)과 세상적인 임무에서의 소명(외적인 소명)이 있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소명 사상은 그의 두 왕국론,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그의 신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특히 두 왕국론에 대한 이해는 루터의 소명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즉 하나님은 영적인 영역, 믿음의 영역뿐만 아니라 세상 왕국의 영역에서도 다스리시며, 단지 역사하시고 다스리시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먼저, 내적인 소명은 믿음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이 앞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등하다. 하나님 앞에서, 구원에 관한 질문에서, 칭의를 바라볼 때 모든 사람은 같다. 루터는 자주 태양을 예로 언급한다(구스타프 빙그렌, 「크리스챤의 소명」, 맹용길 옮김 (서울, 컨콜디아사, 1992), 178). 태양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비친다는 것이다. 농민이나 왕, 가시나 장미, 돼지나 사랑스러운 소녀를 가리지 않는다. 그들 모두가 똑같이 태양의 빛이나 따뜻함을 받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태양처럼 자기 자신을 똑같이 모든 이들에게 내주신 그리스도 앞에서 동등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고, 같은 복음을 듣고, 같은 믿음, 같은 주 하나님을 갖는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서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거지와 부자, 종과 주인 사이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로서 모두 동등한 것이다.

 

둘째, 외적인 소명은 세상의 임무 것처럼 다양하며 많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사이에 여러 신분들을 제정하셨다. 종과 주인, 백성과 왕, 남자와 여자 등과 같이 다양한 계층과 계급들이 존재한다. 루터는 이 많은 신분들을 흔히 크게 ‘세 신분’, 즉 성직자 신분(ecclesia), 결혼 신분(oeconomia), 공직자 신분(politia)으로 나누었다.3 세상에는 명령하는 자와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이 외적인 소명의 차이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고 규정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직업의 일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직업(소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깨닫고 차이를 받아들이며 기쁨으로 감수해야 한다. 비록 지위가 낮더라도 그것에 불평하지 말아야 하고, 지위가 높더라도 자만하지 않아야 한다.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소명, 직업이라는 생각에 기초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분과 직업을 떠맡아 세상에서 이성에 합당하게 행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외적인 소명, 곧 직업에서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세상 사람들의 행동과 구별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직업임을 깨닫고 성실하게 행할 때,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과 하나님 마음에 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이웃을 섬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행해지기 때문이다.4 루터는 성직만이 아니라 다른 직업 모두 ‘신적인 임무’(officia divina, WA 27, 94, 5~6)에 속하며 하나님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과제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5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양한 신분과 직업으로 부르신다. 이러한 소명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돌보시고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펼치시는 수단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우리 신분과 직업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일은 비록 영적인 직업(가령 교회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영적인 존엄을 갖고 있다.

 

결국 내적인 소명과 외적인 소명, 모든 그리스도인의 동등됨과 차이, 이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구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등하게 소명을 받았지만, 세상의 영역에서 주어진 임무와 직업에서는 서로 다르게 소명을 받았다.

 

그럼 우리가 다루는 루터의 설교를 잠깐 살펴보자. 루터는 이 설교에서 역시 두 소명에 관하여 설교하면서 그 소명에 걸맞는 생활, 열매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하늘의 신분, 신적인 존재,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과 영적인 소명에 걸맞은 삶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들을 통해 이런 소명을 굳게 하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존재로서 믿음의 열매가 결여된 세상적인, 이 땅 위의 삶을 사는 것은 합당치 않다. 믿음에 적절한 이러한 행위 중 하나가 바로 겸손이다. 이것은 단지 부분적으로 겸손한 사악하고 그럴듯한 겸손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대하여 겸손하고 결코 멈추지 않는 완전한 겸손을 말한다. 내적인 소명에 따라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이 세상적인, 육적인 신분은 하늘의 신분과 달리 다양하고 차이가 있는데, 곧 각각 어떤 이는 이러한 임무로, 어떤 이는 저런 임무로 부르심을 받는다. 이러한 두 소명과 신분은 서로 분리되어야 하고 구별되어야 한다고 루터는 설교한다. 설교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신의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신분과 소명을 주시해야 한다는 권면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 설교에서 루터는 매우 논쟁적으로 설교한다.6 물론 루터에게 설교는 진리를 위해 거짓 가르침과의 싸움의 장소였다. 루터는 특히 양쪽 방향으로 두 대적과 싸운다. 한편으로 모두에게 동일한 부르심인 내적 소명을 부인하며 자신만의 특별한 부르심을 믿고 구별된 구원의 길을 가고자 했던 수도사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분명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인정된 세상의 다양한 지위와 신분들을 없애고자 폭동도 서슴지 않았던 농민들과 열광주의자들이 루터 설교의 비판 대상이었다.

 

이 설교는 두 필사본(뢰러와 뉘른베르크 필사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는데, 역자는 뢰러의 필사본을 주 번역 대본으로 삼고 뉘른베르크 사본을 참조해 보충했다(WA 34II, 298~308).7 설교 제목과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교 문단의 표제어는 역자가 붙였고, 또 괄호는 본문 이해를 위해 역자가 보충한 것이거나 뉘른베르크 사본의 내용임을 밝혀 둔다.

 

설교문.

 

지난 주일 설교의 본문인 서신서를 계속해서 설교하고자 합니다.8 그 서신서에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즉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에게 믿음 안에 굳게 서야 한다고 가르쳤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이에 관해서는 전 주일에 다룬 서신서를 보십시오). 그런 후에 이제 그는 다른 말씀에서 항상 하듯이, 믿음이 사랑으로 전파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과 소명에 맞는 생활에 대한 권면

 

첫째, 바울은 사람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적합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바울은 믿음을 심은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외적으로 (선한) 행위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지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 서신은 훈계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과 소명(부르심)에 일치하는 외적인 행동을 통해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훈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하여 그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참된 믿음 안에서 행하도록 하여, 그들 자신이 참된 믿음을 갖고 있음을 깨닫도록 그들을 계속하여 훈계하고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9 이것은 믿음이 주어진 것은 단지 믿음에 관해 말하고 쓰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외적인 행동에서 이전의 모습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는 이전과 똑같이 화내고 교만하고 오만하고 조급합니다. 심지어 그는 마치 이전보다 더 악한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믿음을 갖고 있고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외적인 열매들을 맺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믿음의 가르침이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믿음과 소명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도록 항상 권고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오늘 들은 것처럼, 설교의 직무를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역사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를 게으르게 하고 방심케 만드는 옛 아담10과 사탄은 여전히 항상 우리의 육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바울]는 지금 여기 로마 감옥 안에 있어 여러분들에게 입으로 설교할 수 없지만, 이것은 ‘여러분의 영광’(엡 3:13)입니다. 제가 비록 감옥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제 입으로는 못하지만 서신으로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함으로 제 직무를 수행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권하고 여러분을 돌봐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사탄은 제가 여러분과 함께할 때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하지 않을 때 더욱더 여러분을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방심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항상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열매들을 기꺼이 맺고자 하지 않는 게으르고 악한 자의 영혼이 소생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영적인 소명(부르심)

 

우리는 두 종류의 소명(부르심), 곧 영적인 소명과 외적인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영적인 소명이란 우리 모두가 복음을 통해 세례와 기독교 신앙으로 부름을 받았고, 말씀과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소명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료)라고 불립니다. 이 소명은 보편적이고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왕의 아들이라도 하인의 아들보다 더 나은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고, 황제라도 거지가 듣는 복음보다 더 나은 것을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분은 동일한 그리스도요, 모든 사람을 위해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는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서로 동일하게 만드는 공동의 영적인 소명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보다 더 확고하게 붙잡을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다른 그리스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과 강한 그리스도인에게 거주하는 분은 같은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소명인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박사는 평신도와 (영주는 농민과)11 같습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세례를 받았고, 동일한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소명에 일치하게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소명에 적합하도록 소명을 모범으로 삼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명을 받아 그리스도와 익숙해져 하나가 되었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소명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거룩한 존재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동일합니다. 눈은 손처럼 신체의 한 부분입니다. 눈은 발이 신체의 가장 밑부분이며 더러운 곳을 걸어 다닌다고, 신체 가운데 발보다 더 낫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신체가 동일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같은 형제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기 때문에,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 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이요 신체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이요, 진리요, 언급될 수 있는 선한 모든 것인 것처럼, 우리는 그의 예를 모범으로 삼아 따라가야 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우리를 자극하고 감동시켜 다음 같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는 이제 이전처럼 나쁘지 않습니다. 세례와 복음에 따라 제 자신을 보면, 저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태어난 자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저의 신분은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것이요, 저는 참으로 신과 같은 존재요 신적인 본질과 신분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맨발의 수도사12가 자신의 교단과 규칙을 받아들였기에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는 규칙에 따라 살아야 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적인 예를 적용하고자 합니다.13 수도사들이 (자신의 교단에) 걸맞게 (규칙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일이 적그리스도의 어리석고 사악한 교단에서 존재한다면, 우리는 인간적인 삶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하늘에 속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 우리 주와 하늘에 속하는 그리스도인 신분에 일치하는 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분명 다른 교단, 다른 규칙에 해당합니다. 저는 수도사복[등 뒤에 모자가 달린 (그리고 소매와 옷자락이 긴) 수도사 복장]을 입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고) 베네딕트 규칙14을 따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하기보다, 오히려 세례를 통하여 하늘에 속한 기독교의 신적인 규칙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규칙과 행위들을 통해 단지 오물, 더러움, 배설물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히려 기독교의 신분에 거스르는 독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독교의 교단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종류의 영적인 수도사들이 되었는지 보십시오. 다시 말해 여러분들이 하늘의 존재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훌륭한 서약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신분에 걸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신적인, 기독교의 신분을 받아들이고도 인간적이고 악한 삶을 사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맞는 행위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걸맞은 행위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엡 4:2)라고 말합니다. 우선 여러분은 인간의 신분, 그리고 이 땅 위에 속한 육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교만하고 분내고 참지 못했습니다. 수도원에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大罪)15들이 한 무더기로 있었다고 수도사들 스스로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죄들이 부분적으로 존재하지만, 수도원에는 일곱 가지 대죄 모두가 서로 나란히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수도회는 아무리 거룩하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적이지도 신적이지도 않으며, 여기에는 단지 인간적인 규칙과 육적인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열매들이 여기에 머무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에서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겸손으로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우선적으로 교만하지 말고 ‘모든 겸손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짧은 말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삶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그것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칭찬해야 한다면, 그것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겸손의 어떤 것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차치하고서라도 경건하고 복음적이고자 원하는 그들 안에 어떤 교만이 있는지 보십시오. 그들 안에는 이전보다 더 큰 교만이 있습니다. 오늘날 열광주의자들은 말 그대로 사악한 교만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특별한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교만을 가르쳐 자신들의 가르침을 부풀리게 합니다. 우리 복음적인 사람들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들에서 자만하고 무례한 당나귀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겸손이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아주 온전(완전)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제가 만일 영주이고 가장 많이 배운 학자라고 하더라도 절반의 겸손을 행해서는 안 되며, 나와 동일한 영적인 직업(소명)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겸손을 행해야 합니다.

 

저는 두 명의 친구나 제 마음에 드는 자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저 자신을 자랑합니다. 열광주의자들이 그렇게 행하는데, 그들은 서로 나란히 있을 때 ‘사랑하는 형제’, ‘사랑하는 자매’라고 부릅니다. 매우 겸손하기 때문에 여기에 성령이 함께하신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 배웠거나 부자이거나 아름답기 때문에 그에게 표현하는 겸손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가치 없는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사단이 거기에서 모든 교만으로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좋은 친구 하나 또는 둘이 당신 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서로 심하게 싸우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면, 당신은 마치 사탄이 기름을 불에 붓듯이 분노로 불탈 것입니다. 당신은 물론 당신에게 미소 짓고 당신을 공격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을 공격하면, 당신이 어떻게 분노하는지 보십시오!) 그때 조심하십시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곳곳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하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 마음에 쏙 들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인들에게 “형제를 사랑하며 …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롬 12:10)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겸손의 내용과 근거

 

그러나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내면에서 당신은 이것을 훌륭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다른 사람의 소명을 주목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동일한 그리스도, 동일한 세례,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당신은 소명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가 이러한 보물을 당신보다 덜 힘 있게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느끼는 그 그릇(피조물)을 존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례를 받았으며 복음과 성례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그 사람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거주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겸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내적인 소명에 따라 겸손을 보이십시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 것처럼 만유 위에, 만유 안에, 만유를 통해 계시기 때문입니다(6절). 이러한 겸손은 좋은 동기와 근거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결코 위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세례와 복음을 존경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물의) 그릇인 저의 형제도 존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 이웃이 악하게 행동하며 살기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며 이에 대한 대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세례 받았지만 죄에 빠져 있는 형제를 봅니다. 이 사람에게 제가 겸손해야 합니까? 예,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를 권고하라”(마 18:15)고 말씀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저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뒤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을 이교도나 터키 인처럼 여겨야 합니다(마 18:17). 여기에 복음과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사탄의 지배만 있을 뿐입니다.

 

연약한 자를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약간의 부족함 자체를 갖고 있는 어떤 사람이 실수하고 쉽게 분노하게 되거나 다른 심각한 악습(사실 그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자체를 갖고 있는데 그가 권고의 말을 듣고 다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면, 여기서 겸손은 멈춰서는 안 되며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 4:2)는 규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동일한 세례와 동일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가 좀 더럽다 해도, 그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사람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로마서 14:1에서 로마 인들에게 “믿음이 약한 자를 받으라”, 로마서 15:1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사는 것(그리고 우리가 자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경우에 이웃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 신분에 어울리는 일입니다. 겸손함으로, 그리고 연약한 이웃을 감당함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어떤 것도 감당치 않고 작은 종양이나 콧물조차 없는 깨끗한 사람들을 갖기 원한다면, 우리는 깨끗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쌍방 간에 감당해야 합니다. 당신은 저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볼 것이고, 저 또한 당신에게서 그런 것들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단지 즐거이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강하다면 연약한 자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뼈가 살을 담당하도록 육체를 정하셨지,16 살이 뼈를 담당하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우리의 소명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내적인 소명에 따른 것입니다.

 

외적인 소명

 

다른 또 하나의 소명은 외적인 것입니다. 외적인 소명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소명은 이미 신적인 것(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속한 소명입니다. 여기서 영주는 농부가 아니며, 학생은 교사가 아니며, 종은 주인이 아니며,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며, 여자는 남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내적인 소명에서는 서로 같지만, 우리는 서로서로 상이한 육체적인 소명을 갖습니다. 농민들은 폭동을 통해 이러한 서로 다른 소명을 없애고 섞어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오랫동안 충분히 농부였다. 이젠 왕이 되길 원한다. 그리고 왕은 농부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인들이 “우리는 오랫동안 충분히 여자였다. 이젠 남자가 되길 원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녀들과 종들이 “우리가 안주인과 주인이 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영적인 소명에서 어린이라면(왕은 거지 어린이와 동일한 세례를 받습니다), 외적인 소명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아버지와 아들은 내적인 소명에서 서로 같으나, 외적인 소명에서는 서로 다릅니다. 여기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 이러한 두 번째 소명에서 설교자, 혹은 시장이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당신 역시 이 소명을 (성실하게) 기다리도록 주의하시오! 이 소명은 육적인 신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신분은 서로 동일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소명에서 우리는 서로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다른 소명에서도 우리는 모든 겸손함으로 행해야 합니다. 각자는 낯선 소명과 섞이지 않도록 자신의 소명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소명을 (신실하게) 기다려야 한다면, 그는 할 일이 많습니다. 집안의 어머니가 자신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네 개의 손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녀는 해야 할 것이 많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달성할 수는 없고 단지 자신의 집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녀가 매우 부지런하다고 할지라도, 그녀가 원치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분과 소명도 사소한 것은 없습니다. 소명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할 일을 줍니다. 나의 신분에는 백 개의 머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두 소명의 구분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소명을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여자와 남자, 아버지와 아들, 종과 주인, 이들은 세례에서 서로 동일합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육체와 일에 따라 구분하셨기 때문입니다. 각자는 자신의 소명에 합당한 일을 행해야 하는 바, 남자는 자신에 알맞은 일을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두 번째 소명에 대해 특별하게 말하지 않고, 첫 번째 소명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겸손하게 수행하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소명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일치에 관해 언급하며 “우리는 한 하나님(그리고 한 주님, 믿음, 세례)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치 가운데 우리를 강하게 유지하고자 하십니다.

 

사탄은 하나의 세례와 믿음과 성례전에 머물도록 허락지 않습니다. 열광주의자들은 우리와 다른 세례를 갖고 있으며, 재세례파는 아직 다른 세례를 갖고 있고, 우리 무리들 가운데에 세례에 관하여 특별한 자신들만의 의견들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가르침과 권면함으로 열심히 하지 않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분리됩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람이…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일치는 깨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며 스스로 그리스도를 생각해 냅니다. 제가 만일 열광주의자들과 재세례파들처럼 ‘선한 행위들(행위의 의)’을 행하면,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속에 하나의 그리스도를 새기는 것입니다.

 

결론: 영적인 신분과 육적인 신분을 주시하라

 

그러므로 기독교의 일치가 깨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어떤 자는 성직자 모자와 삭발한 머리로, 어떤 이는 고난으로, 어떤 사람은 사랑을 통해 율법을 완성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의 믿음과 맞지 않습니다. 사탄은 이런 것을 위해 노력하며 평온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각자 모두는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세례를 통해 하늘에 속한 신분과 그리스도인의 신분에로 부름을 받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그는 외적인 신분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바르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랑스러운 바울의 권면으로 각 사람을 영적이고 육적인 신분에로 권고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이 권고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 1531년 10월 1일 주일 오후 예배

 

1. 참고 Max Josef Suda, Die Ethik Martin Luthers (Gottingen, 2006), 140 이하.

2. 지원용 편역, 「신앙고백서」 (서울: 컨콜디아사, 1991), 324(필자가 일부 수정함).

3. 루터의 세 신분/직업론에 대해서는 베른하르트 로제, 「마틴 루터의 신학」, 정병식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2002), 451~454; Max Josef Suda, 앞의 책, 146~150; S. Bayer, Martin Luthers Theologie (Tubingen, 2007), 110~139.

4. Paul Althaus, Die Ethik Martin Luthers (Gutersloher Verlagshaus, 1965), 46~47.

5. 졸저, Christus pro nobis. Eine Untersuchung zu Luthers Passions- und Osterpredigten bis zum Jahr 1530 (Munster, 2008), 271.

6. 참고 이에 대해서는 졸고, “루터의 갈라디아서 설교의 특징”, 「갈라디아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목회와신학 편집부 편 (두란노아카데미, 2009 개정판), 92~93; “루터의 고난 주간과 부활주간 설교의 핵심 주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신학사상」 148(2010): 213~217.

7. 번역을 위해 Eduard Ellwein ed., D. Martin Luthers Epistel-Auslegung. Bd. 3: Die Briefe an die Epheser, Philipper und Kolosser (Gottingen, 1973), 40~46; G. Buchwald ed., Predigten D. Martin Luthers auf Grund von Nachschriften Georg Rorers und Anton Lauterbachs vol. 2 (Gutersloh: Bertelsmann Verlag, 1925), 509~515를 참고했다.

8. 9월 24일 오후 예배의 설교 본문은 에베소서 3:1 이하이다.

9. 뢰러 사본에는 “너희는 선행을 통하여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힘써 굳게 하라”고 되어 있다.

10. 뢰러 사본에는 “귀공자 아담”이라고 되어 있다.

11. 뉘른베르크 사본에는 “어린이는 노인과, 농민은 귀족과, 남자는 여자와 차이가 없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12. 맨발의 수도사(Barfußermonch)는 맨발로 다니거나 간단한 샌들로 제한한 교단의 수도사들을 뜻한다. 중세에 프란시스코 수도사들도 여기에 속했다.

13. 루터는 성 버나드나 프란시스를 칭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혹평을 가하며 수도원 제도를 비판한 적이 많다. 루터에게 수도사 생활과 수도원 제도는 행위를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행위의 의(義)의 대표적인 예다. 이런 비판에 관해서는 졸저, Christus pro nobis, 134~137; 졸고, “루터의 설교를 중심으로 본 루터의 재물관”, 「그말씀」 (2010년 9월): 114~118을 참조하라.

14. 중세에 수도사의 존재는 ‘규칙에 따라 사는 삶’을 의미했다. 수도원 제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을 끼친 규칙은 누르시아의 베네딕트가 쓴 ‘베네딕트 규칙’이다. 이 규칙에 대해서는 베네딕트, 「수도규칙」, 이형후 역주 (분도출판사, 2005) 참고하라.

15. 수도사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에 따른 삶, 곧 죄를 극복하고 겸손, 포기, 순종, 덕을 추구하는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삶을 위해 초기 수도원 제도, 특히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에 영향을 받아 요한 카시안(Johannes Cassianus)이 여덟 가지 대죄를 주장했고(교부들의 대화 V, 2~25), 이것은 후에 교황 그레고리 1세에 의해 일곱 가지 대죄로 정리되어 중세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완전한 삶이란 일곱 가지 대죄에 해당하는 교만, 탐욕, 식탐, 분노, 음란, 시기, 나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 대죄들의 특징은 실제적인 범죄 목록이 아니라, 인간을 죄와 타락으로 이끄는 원초적인 악을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16. 루터는 이웃 사랑,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감당해야 함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 육체의 뼈와 살의 비유를 자주 사용했다. 뼈는 강한 자를, 살은 연약한 자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