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개혁주의 신학

[스크랩] 교회의 습관적인 기도 형태에 대하여/이천우 목사

Yahweh Roi 2012. 12. 6. 14:25

교회의 습관적인 기도 형태에 대하여/이천우 목사

 

 

기도란 무엇인가? 할 때 정의를 내리기를 일반적으로는 "영혼의 호흡이다",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 정의에 있어서 심각히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기도를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계속하여서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기도를 오랫동안 하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많이 하느냐 하는 양적이요 수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기도를 보게 되면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하는 것으로 교육을 시키고 훈련을 시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되는 양 말입니다. 또한 기도를 "끈질기게 간구(간청)해서 응답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럴 경우 기도를 하나님께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를 받아내는 요구로 이해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기도를 부르짖는 것으로 교육시키고 또한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다 보니까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기타 기도 모임 등이 그런 목적에 의해서 실시가 되어지고 있습니다.

또 그때마다 있는 힘을 다해서 크게 부르짖게 합니다. 게다가 "주여"를 삼창하게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데에는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비결이요, 자신들이 소원하는 바를 응답받는 비결이라고 보는 것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기도는 필시 도깨비 방망이로 둔갑하게 됩니다. 뽀빠이에게 힘을 주는 시금치가 되며, 모든 자물통을 척척 열어대는 만능의 열쇠가 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 없이 기도가 가능한가?"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골방 기도를 언급하면서 특히 구제와 연관하여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은밀'입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자신의 하는 것(기도)을 드러내어 보여주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참 구제함은 구제의 필요성을 느껴서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이 곧 자기 자신의 뜻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단지 인위적인 자선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지고서 하는 구제여야 하듯이, 기도 또한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사는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서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말을 많이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들으실 줄로 생각하기에 할 말을 생각하고 말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과 하나된 관계에 의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으로 구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합니다. 안다고 할지라도 말을 습관적으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조금 하라고 하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기도의 말을 정도를 인하여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고, 듣지 않고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을 적게 하든, 말을 많이 하든지 간에,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곧 기도는 말을 하는 그 말 자체에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말이 필요 없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눈동자, 눈빛만 보아도 그가 무슨 말을 내게 하려고 하는지를 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 정도의 사이까지 되었다고 하면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아니 대단하기보다는 그것이 정상입니다.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리고 자신은 그의 의중대로 따를 마음과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간의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의 의중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각도 참고는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든지, 모든 일은 의논해서 해야지 그렇지 않고 자신의 의사가 무시된 것은 함께 할 수 없다든지 하면 이는 곤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말은 말을 해야만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어 있을 대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을 안다고 하면, 그리고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여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살 마음과 자세, 준비가 되어야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자녀 삼으신 아버지로서 자신 안에서 온전히 의지하여 있는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하나님과 같이 온전한 자가 되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십니다. 구하기 전에 말입니다. 구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을 통해서 기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이 기도문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해서 '주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을 엉뚱하게 이해하여서 기도 조목 조목을 마치 우리에게 구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고자 하신다 등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 내게 필요한 물질을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받는 방법으로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기도를 무엇인가를 구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가 방법이 되고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을 통해서 말씀해 주신 기도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면, 지금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어 사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신앙고백적으로 드러나게 하신 것이 기도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무엇으로 말미암아서 사느냐고 할 때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대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 그리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짐 속에서 라고 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오늘과 또한 내일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처럼 온전하고자 하여서 행하여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생명을 부지하려고 하면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니까 그것을 구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의 죄를 사하여 주어야만 또한 내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니까 남이 나에게 지은 죄를 용서해 주고 그것을 내세워서 내 죄를 사하여 달라고 구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험, 악에서의 구함 등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 모든 삶들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원하심의 수준에까지 이르러 가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서 행하여지는 일들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사는 가운데 일용할 양식도 주어졌으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며, 시험과 악에서 구하여지는 일들을 겪는 것입니다. 그래 그런 모든 일들이 있는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 그의 뜻을 인하여서 살아가는 그런 자가 되라고 하는 이해에서 주기도문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의 생명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왔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구하여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에서 앞으로도 그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자 앞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그 사람에게 같이 있어지기를 구하며, 그와 같이 자기의 죄 사함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생명의 공동체인 형제 자매의 열망 때문입니다. 시험과 악 앞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그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나님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는 차원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본다』는 차원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기도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7-12절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 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제는 이 말씀이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끌어내고, 자신의 소원과 문제 해결을 위한, 설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하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한 말씀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여기서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할 때 그 가진 믿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만나기 위하여서 얼마나 간절하고 소망하여야 하는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불신의 아들이 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구하는 것과 대비하여서입니다. 그러면서 불신에 속한 자와 불신의 아들과의 관계,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로 설명하여 주십니다.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떡을 주지 돌을 주는 자는 없습니다.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을 주지 뱀을 줄 자는 없습니다. 그것은 선한 자만이 아니라 악한 자라도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똑 같습니다. 무엇이 똑 같은가 하면 인간이 구하는 것과 줄 수 있는 것이란 떡과 생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 불신에 속한 자는 그 본능과 본성이 육적인 욕망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 그들은 구한다고 하는 것이 떡과 생선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손에 넣습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자기들의 생명을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거기에 의존합니다. 그런 그들에게서는 그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라도 떡을 주고 생선을 주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 떡을 주고 생선을 주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거기에만 관심이 있고, 또한 염려가 되기 때문에 매달려 구합니다.

하나님도 구하는 자기의 자녀에게 줄줄 압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주시고자 하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시고자 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말입니다. 생명과 몸을 염려하는 이방인들은 떡과 생선, 살 집과 의복에서 '살 희망'을 봅니다만,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이미 생명과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며, 살 집과 의복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서 한 순간이라도 연장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제공하여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그 몸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고 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염려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참으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채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십니다.(눅 11:13). 이는 하나님 곧 자신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우리의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생명을 돌보아 주십니다. 한 날의 괴로움이요? 그날의 것으로 족하게 하십니다. 그런 마음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서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 된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주시고자 소원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소원하심과 우리의 구하여야 할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하심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원을 가지시고 우리와의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시며 또한 그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시는가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하심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 대한 믿음으로 회복된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만나고자 하는 마음과 삶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마음과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의 증거로서 나타나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서만 있는, 보여지는 특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기도는 그가 아들이실지라도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모습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나 바울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바울에게서는 그에게 닥쳐지는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함께 하여 주시는 것으로서의 모습으로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기도를 보면 처절한 고난 속에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깨닫고서 감사와 기쁨을 갖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신 이 기도가 우리를 우리의 마지막 일생 다가는 날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우리의 전 생애에서 고백되어 지고 있다고 하면 그는 그만큼 하나님과 가까이 한 자일 것이며, 하나님과 만난 삶을 가지고 산 자일 것입니다. 그는 그만큼 믿음으로 산 자,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하여 믿음이 성장하는 가운데서 산 자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로 살아가는 그 자체인 것이지, 결코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노력을 하고, 시간을 투자해서 많은 말을 했느냐, 몇 분 동안 엎드렸느냐, 무엇을 요구하고 응답 받았느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좇아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하는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성령, 곧 자신의 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자로서 성령의 주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성령을 다른 사람이 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할 최대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최종적으로 설명하기를, '대접'으로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기의 대접은 누구를 잘 영접하여 대우해 주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성령을 받은 자로서 살기를 원한다고 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같이 우리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받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여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이 뜻을 이루기 위한 삶으로 간절하여야 합니다.

기도란 것이 이런 것인데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던 시기인 다니엘서 9장 19절의 다니엘이 백성을 위하여 한 기도인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를 들어서 다윗도 주여 삼창을 하면서 기도하였다고 하면서 삼창 기도를 기도의 전형으로 삼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그와 같이 기도한 것은 예루살렘이 70년 동안 황폐한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에 깊이 생각하는 중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서 끼니를 넘겨가면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죄의 용서를 빌면서 사람마다 주님이야말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두 다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오늘날에 기도의 방식에 있어서 주를 삼창하게 하는 것으로 삼다니요?

어디 그뿐입니까? 솔로몬이 일천번의 제사를 드렸다고 하면서 '1000일 특별기도회'를 한다고 합니다. 그 해석이 지극히 자기 생각대로 입니다.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르고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온 이스라엘의 대표자와 관리들을 모아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때 솔로몬은 그 예배를 기브온 언덕의 성소로 올라가서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아직도 하나님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성막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법궤는 그곳에는 없었습니다.그것은 한동안 기럇여아림이 있던 법궤를 다윗이섬 예루살렘에 장막을 치고 모셔다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신에 기브온의 성막 앞에는 '우리'의 아들이며 '홀'의 손자인 '브사렐'이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놋을 입힌 제단이 놓여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온 이스라엘의 대표자와 관리들을 이끌고 나아가 성막 앞에 있는 그 놋제단에 '일천 마리의 짐승'을 여호와께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이 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은 그날 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나누신 대화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부왕인 다윗에게 하셨던 언약을 자신에게도 이루어지게 해 주실 것을 바라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데 따라 하나님의 지혜와 깨달음을 가지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대로 솔로몬이 '일천 마리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천 날동안 매일 한 마리씩 천 마리의 제사를 드렸다고 지극히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성도를 1000일간의 기도회에 동원시키고 그때마다 매일 헌금을 바치게 합니다.소위 응답 받으려면 그렇게 하라는 식입니다. 가령 그럴 경우 단 하루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래서 단 한 번 헌금을 하지 못하였으면 그 성도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불신앙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죽자 사자하고 달려 들어서 '1000일 특별기도회'에 개근하여 참석할 수 밖에요. 매사가 다 이런 식입니다.

또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 때입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유다를 다스린 지 3년쯤 되던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고 이 때 다니엘을 위시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젊은이들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을 선별하여 특별히 교육시켰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왕궁에서 일을 보게 하려는 계획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이 다윗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하는 사건을 통해 정치 세계에 전면에 두각되게 되었는데 느부갓네살에 이어서 벨사살과 다리오 시대에서도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런 다니엘을 적대시하는 총리들과 지방장관들은 그를 제거할 빌미를 찾았습니다. 가장 좋은 안은 다니엘이 가지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30일 동안에는 왕 외에는 그 어떤 신이나 그 누구에게도 빌거나 기도하지 못하게 금지령을 내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금지령을 어길 경우는 사자굴에 던져 넣어 죽음을 당하게 한다는 조건을 걸고서 말입니다. 이 금지령이 어명으로 공포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집으로 돌아가서는 이층방으로 올라가 늘 하던 대로 예루살렘 쪽으로 나 있는 창문 앞에서 무릎을 끓고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이러한 행위로 곧 발각되어서 체포되어 사자굴에 던져지는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기도를 굳이 기록하여 언급하신 것은 그의 경건한 삶을 높이 칭찬하며 그의 기도를 만인의 모범으로 삼아 기도의 전형으로 그대로 따라서 하게 하고자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얼마든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영웅심리에 이끌려서가 아닙니다. 그가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지면 그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는 화를 겪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감추지 않은 것은,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요 또한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로서 살아계신 참 신 여호와 하나님을 온 세상에 선양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고수하는 책임을 다하는 것은 선지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선지자로 있는 사명이 있고, 그리고 이스라엘로 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온 세상을 향한 이스라엘의 위치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 없이 단지 다니엘이 보인 기도만 가지고서, 그래서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하였다고 해서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느새 이런 식의 기도 패턴이 교회마다 자리잡아 성도들의 신앙의 정도와 상태를 가늠하는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예수님에게서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날 밤이 다 지나가도록 기도하였으니 철야기도하자고 합니다. 새벽에 기도하였으니 새벽기도를 하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이 기도를 하시게 된 원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기도의 전형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어떤 자로 만들고 있습니까? 소나무 뿌리도 뽑아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것 같고 날씨도 햇빛이 들게 했다 비가 오게 했다 마음대로 하고 쓰러져가는 기업이나 집도 일으키고 자식을 유명대학에 합격시키고 다 죽어가는 자들도 넉넉히 살려내고 무엇보다도 교회를 교인 수백, 수천, 수만으로 성장시키고, 이것도 부족해서 한국에서, 더 나아가서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가장 큰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그야말로 불가능이 없는 능력을 지닌 기세등등한 종교 영웅주의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기도를 자기 의를 세우는 것으로 합니다.

이 모두는 참으로 무지한 신앙의 행태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한갖 잡다한 무속신앙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참으로 이러한 신앙의 행태를 경계해야 합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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