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내세에 대한 명상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현세에 대한 지나친 애착에서 멀어지게 하신다. 1-2)
존 칼빈
1. 현세 생활의 허무성
어떤 환난이 우리를 압박하든 간에, 우리는 현세를 무시하는데 익숙해지며, 그렇게 됨으로써 내세를 활발하게 명상하기 위한 그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본성이 이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강한 동물적인 애착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잘 아시고 우리가 이 애착심에 너무 오래 잡혀 있지 않도록 우리를 끌어내시며 우리의 태만을 없애버리기 위해 가장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늘의 영생 불멸을 동경하지 않거나 그것을 얻으려고 평생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사후의 영생을 바랄 수 없다면 우리의 처지는 야수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그것은 인간으로서 하나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계획이나 노력이나 행동을 검토한다면, 우리는 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 우둔함은 우리의 지성이 부귀 영화의 허망한 광채에 마비되어,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탐욕, 야심, 정욕 등에 억눌려 더 높이 비약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영혼 전체가 육의 각종 유혹에 빠져 지상에서의 행복을 구한다.
주께서는 이 악한 사태를 없애기 위해서 현세 생활의 불행을 끊임없이 증명하심으로써 그 허무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현세에서 깊고 든든한 마음의 평화를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전쟁이나 소란으로, 강탈이나 기타 피해로, 그들의 마음이 불안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들이 곧 없어질 재물을 너무 탐내지 않으며, 이미 가진 것을 너무 믿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는 추방으로, 흉작으로, 화재로, 기타 방법으로 그들을 빈곤으로 몰아넣으시며, 적어도 풍족하지 못한 처지에 있도록 제한하신다. 그들이 마음놓고 결혼 생활을 즐기지 않도록, 주께서는 악한 처나 불량한 자녀나 가족의 죽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며 교만을 꺾으신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관대히 다루시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허영심으로 부풀고 자신감으로 기뻐 날뛰지 않도록 그들에게 병과 재난을 보내어, 이 모든 좋은 것은 없어지는 것, 불안정하고 무상한 것임을 눈으로 보게 하신다.
십자가의 훈련을 통하여 현세 생활의 불안을 깨닫는 때라야 우리는 올바로 전진을 할 수 있다.
현세 생활은 그 자체만을 본다면, 불안과 동요와 불행이 무수히 많고 순수한 행복은 아무 데도 없다.
인생의 행복이란 것은 모두 확실하지 못하며 곧 없어지며 허망하며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이 섞여 있다.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동시에 현세 생활에서 우리가 바라며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분투 노력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가 얻을 면류관을 생각할 때에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세 생활을 철저히 무시하지 않으면, 참으로 정신을 차려 내세를 원하며 깊이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2. 우리는 현세 생활의 허무성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게 사랑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 둘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따라서 영원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이 악한 족쇠를 부수어 버려야 한다.
현세 생활에는 우리를 꾀는 것이 많으며, 즐겁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속이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런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는 재앙의 아픈 자극을 끊임없이 받으면서도 인생의 가련상을 고려할 만한 각성이 없는데 만일 부하고 행복한 기쁨이 장구히 지속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생은 연기나(시 102:3) 그림자 같다는 것은(시 102:11) 유식한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제일 잘 아는 속담이다.
이 생각을 대단히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놀라운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처럼 등한시하거나 잘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
우리는 마치 지상에서 영생 불사할 작정인 듯 모든 일을 시작한다. 시체를 묻거나 묘지를 통과할 때에는 죽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서 아주 훌륭한 철학을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때도 우리의 철학은 일시적이어서, 돌아서면 곧 사라지고 전연 기억이 없다. 극장에서 좋은 장면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박수 갈채와 같이 결국 증발하고 만다. 죽음을 잊어버릴 뿐 아니라 죽을 운명까지도 우리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우리는 경솔하게 지상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누가 "사람은 하루살이"라는 속담을 말하면, 우리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 없이 하는 일이고 존재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러면 말로 충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경험을 통해서 지상 생활의 가련상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대단히 유익하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확신하게 된 후에도 지상 생활에 최고의 선이 내포되어 있는 듯이 여전히 인생에 대한 어리석고 비열한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실 때에는 우리의 태만을 떨쳐버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을 무시하고 전심 전력하여 내세의 생명을 명상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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