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의 뿌리, 이원론과 상승 사상>
신앙은 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와 심각하게 진리를 왜곡하는 신비주의의 정체를 규명하려면, 먼저 플라톤의 철학 사상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신비주의의 뿌리가 바로 플라톤의 이원론과 상승사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언급하기에 앞서, 골로새서의 말씀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를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쓴 서신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한 권면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8에서,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그리스도인들을 노략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는데, 18~19절에 이르러 바울의 통찰은 더욱 예리해집니다. 무엇인가를 봤다고 하며,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만을 우월하게 여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개인적인 체험을 의지하며, 자신들만이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1세기 성도들을 향해, “제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며 미혹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간파하도록, “그 본 것에 의지하며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골 2:18하-19상)고 구체적으로 골로새 교회에 있는 거짓 교사의 정체를 규명합니다. 즉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육체의 마음, 쉽게 말해 옛사람의 성품에서 나온 것을 근거 없이 과장하여 떠드는 무리들로서, 그들이 보았다고 하는 것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 본 것을 의지하는 것은 참된 은혜를 경험해 보지 못한 비중생자의 태도임을 분명히 합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본 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들임을 “저는……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는 구절을 통해 역설적으로 주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는 것입니다.
뒤이어 20-23절에도 플라톤 철학의 영향력 아래로 그리스도인들을 몰고 가려는 또 하나의 미혹, 금욕주의에 대한 경계가 등장하는데, 육체를 비천하게 여기면서 무시하는 금욕주의 역시 플라톤이 말한 정신세계에 속한 신성을 소유하고자 한 사람들의 사상이었습니다. 즉, 육체를 제한함으로써 일종의 영적인 상승을 얻고, 이를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고자 한 것입니다.
나중에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경향, 하나님을 직접 보고 경험하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비주의적인 체험 추구를 영광의 신학이라고 명명했는데, 그것은 이미 1세기 전부터 있어 온 풍조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초기 영지주의자들이 상승 신학으로 골로새 교회를 비롯한 다른 교회들을 유혹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분별이 쉽지 않은 이 교묘한 세상 철학의 공격을 바울은 본문에서 보다시피, 정확하게 분별하여 배격했습니다. 분별력이 없어 혼란을 겪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 진리인지 바르게 알려 주었습니다. 1세기 당시 사도들의 주된 사역은 무엇이 진리인지 바르게 알려 주는 것이었고, 이러한 지도력은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초대 교회 때보다 더 심각하면 심각했지 낫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골로새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날카로운 지적은 1세기 성도들뿐 아니라, 20세기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침이 됩니다.
영지주의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오늘날 교회
신비주의를 좇는 태도는 기독교의 진리를 등지고 배도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미 초대 교회에서 배격한 상승 사상을 오히려 공공연하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상승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일단 신비주의적인 배경을 가진 교회들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온갖 초자연적인 현상을 추구하며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들,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려는 시도를 특별한 영적인 체험을 갈구하는 신앙적 행위인 것처럼 포장하는 태도들, 어떤 신비한 체험을 마치 신앙의 궁극적인 경지인 듯 여기며 그 체험에 집착하는 모습들이 모두 상승 사상에 물든 결과입니다.
이런 신비주의 성향은 일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각종 영성운동들과 관상 기도, 방언이나 병 고침 등의 은사 집회들 속에도 신비주의는 짙게 배어 있습니다. 자연과 하나님을 일치시키고, 아예 노골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직통 계시나 말씀을 들으려 하는 시도들이 요즘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최근 서울 강남 지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예언자 운동이나 오순절이나 은사주의 운동에 속한 여러 그룹들 역시 신비주의적 배경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안에서 신비주의의 확산은 이제 심각한 단계에 도달했고, 균형 감각을 잃은 신학교나 선교 단체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 때문에 ‘테리토리얼 스피릿(territorial spirit)’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지역을 관할하는 특정한 귀신이 있다는 전제 아래, 그 귀신을 결박하여 그 지역과 도시를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데, 특정 지역의 영적 쇄신이나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성시화 운동’이나 ‘땅 밟기 운동’ 등이 이 일환입니다.
이들은 또한 육은 천하고 영은 귀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은사를 초자연적인 은사와 초자연적인 은사로 구분하며 우열을 논합니다. 가르치는 은사는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방언이나 신유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들만을 우월하게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마치 경건한 추구인 양 등장한 것이 자아 파쇄 운동입니다.
신비주의 계열의 다양한 영성 운동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데, 이런 면은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의 범신론적 종교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를 좇는 태도는 기독교의 진리를 등지고 배도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신비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 있습니까? 신비주의적인 종교 행위는 교회가 오랫동안 추구해 오던 것이데, 배교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너무 편협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신비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뿌리는 헬라 철학이라는 세상 정신이기에, 기독교 안에서의 신비주의 확장은 곧 기독교 안으로의 세상 정신의 유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자는 시도 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믿자는 노력의 일환으로 봐 줄 수 없는, 아니 결코 그렇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박순용
•총신대신대원 졸 •영국 에든버러 프리 처치 칼리지와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영적 대각성과 청교도 연구 •전, 호주 퍼스 한인장로교회 담임 •현, 하늘영광교회 담임목사 •저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예수를 믿는다는 것은」「기독교 세상의 함정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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