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조엘 비키
알미니안주의는 아주 넓지만 강을 건너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펜실베니아의 랑카스터 카운티에 있는 다리와 같다. 이 다리는 도보로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없다. 이처럼 알미니안주의는 여행하기에는 너무나 넓고 쉽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가슴이라는 항구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결국 알미니안주의는 그것이 약속하는 일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못살게 군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약화시키고 인간을 높이며, 자유주의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줄 뿐이다.
반면에 칼빈주의의 길은 좁아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그렇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는 자기 부인을 요구하고 인간이 어중간한게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칼빈주의는 신자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 여호와의 품 안으로 인도한다. 지성으로 믿고 영혼으로 경험된 칼빈주의의 진리들은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인간을 인간 되게’ 만드는 신학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죄인을 겸손하게 하며, 성도들을 격려한다. 칼빈주의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시면 그 누구도 자신을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롬8:31). 라일은 “그리스도의 군병은 전쟁에서 죽거나 실종되는 법이 없다”라고 말했다.
에롤 헐스(Erall Hulse),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철저하게 전능하고도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확증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모두를 강조하기 때문에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화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들은 우리가 반드시 무릎으로는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발로는 알미니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순수한 생각이 아니다. 칼빈주의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알미니안주의만큼이나 인간의 책임의 역할을 단언한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들에 대하여 화해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함께할 수 없다.
- 구원의 시작이 하나님 아니면 인간이라는 점
- 인간의 타락은 부분적이든지 전적이든지 둘 중 하나라는 점
- 선택이 무조건적이든지 조건적이든지 둘 중 하나라는 점
- 속죄가 제한적이든지 보편적이든지 둘 중 하나라는 점
- 구원적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든지 저항할 수 있든지 둘 중 하나라는 점
- 성도는 믿음으로 견인 되든지 떨어지든지 둘 중 하나라는 점
이 차이점들은 단지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다. 이것들은 각기 다른 사상 체계를 제시한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담대하고도 활력 넘치게 선포되어야 할 성경적 사상이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23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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