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영적 침체의 2단계: 은혜의 수단을 형식적으로 사용함
조엘 비키
2. 개인적 영적 침체의 2단계: 은혜의 수단을 형식적으로 사용함
영적 침체가 보여 주는 병리적 현상은 곧 모든 은혜의 수단으로 퍼져 갑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는 않지만, 이미 마음은 예전처럼 교회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외면적 은혜의 수단들이 개인적이고 은밀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대신합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출입하고 있지만, 영적으로 볼 때 영혼은 성전의 바깥뜰을 거처로 삼고 맴돌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영혼을 교회의 문턱 안으로 이끌 능력이 없습니다. 목회자들도 예전처럼 그렇게 체험적이지도 않고 그토록 간절하게 영혼을 찾아 나서지 않는 것에 익숙합니다. 때때로 예배가 기쁨보다는 부담스러운 짐이 되는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여전히 규칙적으로 읽지만, 이전처럼 성경을 읽으면서 경험할 수 있었던 영적인 감동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아무리 자신의 신앙이 세상 사람들의 모욕이나 멸시를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살겠다고 다짐하던 과거의 열심과 치열함과 강렬한 소망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습니까? 옛날에 성경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풍성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그 모든 거룩한 교훈과 귀한 약속과 감미로운 위로와 신실한 충고와 애정 어린 훈계의 호의적인 책망과 영혼을 압도하는 교훈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이 메말라 버릴 때 남게 되는 것은 무미건조한 책으로서의 성경뿐입니다. 더 이상 감동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성경책을 적시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너무나도 드물고 억지로 짜내는 눈물은 너무나도 위선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 속에 심겨진 영적인 씨앗이 성장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수분을 공급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절망적인 심정에서, 오랫동안 방치하여 부패해 버린 만나를 회복하기 위해 과거에 접했던 성경 본문에 기대기도 하지만, 그것도 부질없는 짓입니다. 영혼의 갈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됩니다.
모든 은혜의 수단 중에 정수이자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한 번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고 행방불명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지닌 생명의 본질이요, 그들이 지향하는 성화의 근원이요, 그들이 누리는 기쁨의 원천이요,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제목이요, 그들의 눈길이 향했던 영화롭고도 오직 유일한 분이시오, 과거 그들이 추구했던 지표인 예수님은 이제 조용히 물러나십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죄를 주님의 보혈 앞으로 가져오지 않을 뿐더러, 자신들의 부정직함을 주님의 은총 앞에 고백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고난을 주님의 사랑 앞에 내어 놓지도 않습니다. 한때 주님은 그들이 그렇게 찾고자 무던히 애쓰던 사랑스런 신부와도 같았지만, 이젠 어디서도 그분을 발겨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의 경우에 그들이 스스로를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이나 목회자들을, 직분자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서글픈 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는 것을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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