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기자에 의한 '믿음'에 대한 정의]
- 스데반 황 목사
:Estin de. pi,stij evlpizome,nwn u`po,stasij( pragma,twn e;legcoj ouv blepome,nwnÅ
(에스틴 데 피스티스 엘피조메논 휴포스타시스, 프라그마톤 엘렝코스 플레포메논)
개역 개정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번역하였다.
먼저 하나 하나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피스티스는 믿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어를 보면 ‘믿음은 휴포스타시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믿음은 휴포스타시스이다”, 즉, 정의로 내려져 있다. 그리고 휴포스타시스는 “엘피조메논”이라는 피동태 현재 동사 분사형에 의해 서술되고 있다.
그러면 휴포스타시스가 무엇인가? 원어 사전 <프라이버그>를 찾아보니 “어떤 사건 또는 사물 배후에 놓여있는 객관적인 실체”라고 되어 있다. 또는 “본질, 실상, 확신과 완전한 신뢰를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실체, 소망의 기반, 토대” 라고 설명해 놓았다.
즉, 믿음은 어떤 사람의 모든 것이 서 있는 그 사람의 실체, 또는 기반, 토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믿음의 속성은 “엘피조메논”이 그 “휴퍼스타시스” 위에 선다는 사실이다. 엘피조메논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피동태 현재 동사 분사로서 소망되어지는”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믿음의 주체의 입장에서는 바라는 것이지만, 그 단어 자체로 볼 때는 어떤 약속 또는 인격적인 대상이 전제되고 있다.
다시 설명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아이에게 ‘내가 밥을 사 줄게’라고 하면, 그 아이는 이제 곧 밥을 얻어 먹겠구나 하면서 밥을 먹을 것을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 바람은 어떤 사람의 약속에 의해 발생되는 바람이다.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그 아이의 믿음이 그 아이의 자아 속에서 휴포스타시스가 되어 그 아이의 감정, 생각, 결정 등을 판가름 나게 한다. 즉, 그 아이의 믿음은 그 아이의 존재의 본질, 실상, 실체가 되어 그 아이의 모든 생각 및 감정, 의지, 활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정의는 (프라그마톤 엘렝코스 블레포메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믿음 피스티스와 곧바로 연결되는 단어는 엘렝코스이다. 그 이유는 엘렝코스만이 주격 명사로서 주어인 피스티스에 대해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라그마톤과 블레포메논은 엘렝코스에 대한 서술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일단 믿음의 정의는 엘렝코스이다. 이 원어의 의미는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엄격하고 테스트를 친다. 연단하다.”, “증거”, “내면의 확신, 분명한 확신” 등의 뜻이 있다.
그리고 이 엘렝코스를 서술하는 두 단어, 곧 “프라그마톤”과 “블레포메논” 중에 먼저 크라그마톤은 “프라그마”라는 단어의 복수형 소유격인데, 프라그마는 “어떤 행동 및 사건이 진행된 후에 남은 결과”, “반드시 되어져야 하는 어떤 과제, 일”,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것, 사건, 일”이라는 뜻이다.
또다른 서술용 단어는 “블레포메논”인데 그 앞에 부정어 ‘우’가 붙어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또는 “영적으로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믿음을 정의하면, 두 번째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한 증거, 또는 내면의 확신”, 또는 “영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어떤 사건들에 대한 분명한 확신, 또는 증거”라는 뜻이다.
지금 이 두 번째 믿음의 정의에서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되어진 현상 및 결과물, 또는 사건들에 대해 어떤 확신, 또는 증거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사건 또는 결과물, 일들, 현상에 대한 분명한 확신 또는 증거가 믿음이다. 증거라는 것은 이미 인생을 통해, 또는 역사 가운데 ‘과거’에 만들어진 확증된 변함없는 사실들 또는 확신을 말한다.
바로 이 믿음이 구약의 성도들이 지녔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 그리고 영원한 대제사장 되심, 또한 단번에 영원한 대속 제물이 되심,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사실을 증거한 후에, 우리에게 믿음에 집중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좀더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바울 서신을 참조해 보겠다. 2절은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선포한다. 선진들은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 선진들의 이름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어 있다. 2절은 그들은 믿음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믿음 때문에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는데 아무런 차질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 믿음의 가장 중요한 선진인 아브라함에 대해 살펴보자.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롬 4:18-25)
바울이 설명한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믿음의 두 가지 정의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믿음은 어떤 인격체가 말하는 약속을 듣고 그 약속을 나의 “휴포스타시스”로 삼아 나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 믿음인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그 약속을 그의 “휴포스타시스”로 삼아 그의 인생을 다 걸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또는 사건들 속에서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 때문에 어떤 확신, 또는 증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및 아직 알 수 없는 미래의 사건 및 일들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개인적으로 다 알 수 없어도 약속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그 분의 약속을 나의 모든 것으로 삼고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고 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결국 먼 장래에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가 되어 오셔서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과 영원한 나라를 주시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사실 아브라함은 복음을 믿은 것이며, 이미 구약의 선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를 바라보며 기뻐했다.
[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 3:6-9)
[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8: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 8:56-59)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그분의 약속을 나의 모든 것으로 삼는 것인데,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음에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 마음에 믿음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성품에 대한 체험을 통해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만들어지는 절대적인 “휴포스타시스”이며 또한 동시에“엘랭코스”이다. 즉, 믿음은 내 모든 것을 걸게 되는 “휴포스타시스”, 곧,‘실체’ 또는 ‘실상’이며 또한 동시에 “엘랭코스”, 즉, 과거 하나님의 역사 및 실제 사건들을 통해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는,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분명한 확신 또는 증거가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 또는 하나님의 과거의 행하심, 하나님의 계시 등을 나의 모든 것으로 삼는 것이요, 또한 장래 및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주의 계시를 근거로 증거로 삼고 분명한 확신을 취하는 것이다.
이에 믿음은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던지는 것이다. 특히 그분의 약속이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계시 및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께로 수렴하게 되어 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생겨난 믿음에 의해 인류 역사 끝까지, 아니 더 나아가 저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까지 주의 약속 및 계시로 인하여, 이해하면서 주 앞에서 결정을 내려가면서 주와 교제하며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체와 그분의 세계의 실체는 우리 눈과 이성적인 감각으로는 누릴 수 없다. 또한 장래에 대한 것 역시 우리의 눈과 감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 및 또한 미래는 오직 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해 우리가 알 수 있고 붙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생겨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하고, 그 계시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 자아가 이러한 신령한 역사 앞에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을 지닐 때 우리의 믿음은 든든하게 서 갈 것이다.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참된 개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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